'단편'에 해당되는 글 15건

  1. 돼지 날다. 4 2009.11.30
  2. 나이트 후드 - 현실의 현실 2009.07.13
  3. 스치다. 2009.07.06
  4. 살구잼 2009.07.06
  5. 그림자 2009.07.06
  6. 상자 2009.07.06
  7. 구름 2009.07.06
  8. 연락 2009.07.06
  9. 자유 15제 2009.07.06
  10. 주말 2009.07.06
  11. 바람 2009.07.06
  12. 고백 2009.07.06
  13. 질문 2009.07.06
  14. 여행 2009.07.06
  15. 햇살 2009.07.06

돼지 날다.

from 단편 2009. 11. 30. 22:52 by 케르베로스

비가 내리는 주말, 한참을 침대에서 밍기적 거리다가 결국 배가 고파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운이 하나도 없는 흐느적 거리는 걸음으로 부엌에 도착해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팔팔 끊는 물에 파스타 면을 삶고 팬에다가 마늘, 양파, 베이컨을 노릇하게 굽는다.
다 익은 파스타 면을 팬에 넣은 후 올리브 오일, 후추, 굵은 소금으로 간을 한다.
반으로 짜른 방울 토마토로 장식을 하면 맛있는 파스타가 완성 되는 것이다.

거실로 나와 TV를 보며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타국에서의 식사는 언제나 조용하고 외롭고 허무하며 귀찮은 일이다.
집중하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는 영어의 축제 속에서 한 남자가 말했다.

"돼지가 날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을 사랑해요."

그러자 고백을 들은 여자는 남자를 꼭 안으며 슬픈 눈으로 대답했다.

"돼지가 날 수 있게 된다면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잠깐의 혼란이 남자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고 크리스마스 세일을 알리는 광고가 나왔다.
나는 순간 이해를 하지 못하고 방금 전의 남자와도 같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아무래도 나랑은 상관 없잖아? 라며 넘어가버렸다.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귀찮음만 따라오지 않는다면 파스타는 정말 맛있는 음식이다.
그렇게 설거지를 하다가 나는 잠깐 슬픈 기분이 들었지만 얼른 설거지를 끝냈다.
다시 침대에 기어 들어가며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는 슬프게도 너무나도 재치있게 남자의 고백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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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후드 - 현실의 현실

from 단편 2009. 7. 13. 18:59 by 케르베로스


나이트 후드 - 현실의 현실

전선을 보호하기 위해 가지가 잘린 가로수들, 놀이동산도 아닌데 롯데 백화점 옆에 서 있는 회전 관람차,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내가 너보다 10년은 먼저 세워졌다고 말하는 듯 한 현대 백화점. 이곳은 하나도 변한 게 없는 1 년 만에 돌아온 내 고향 이었다. 한 달 후에는 다시 떠나야 하는 고향이지만 타국에서는 느낄 수 없는 친숙한 풍경이며 향기가 나를 들뜨게 했다.

“어디 가니?”
“아, 잠깐 산책 좀 하고 올게.”
“아직 추우니까 옷 따뜻하게 입고 나가렴.”
“응.”

유학생활을 하면서 생긴 취미가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사진이었다. 전문가들처럼 비싼 카메라를 쓰는 건 아니다. 그저 싸구려 똑딱이 카메라로 이곳저곳을 찍는 것이 다지만 그래도 스스로 결과물에 만족하고 있었기에 오늘도 거리를 돌아다니며 고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파트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비둘기 공원, 방학 중이라 텅 빈 근처 대현 중학교의 운동장, 2년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지금은 내 공익후배들이 일하고 있는 울산 남구청. 모두 잊지 않기 위해 하나하나 사진으로 남겼다.

“그래서 전에 이야기했던 그 중국 여자애랑은 잘 되었니?”
“만나기는 가끔 만나는 데 친구 이상은 힘들 거 같아. 사진 있는데 보여줄까?”
“어서 보여줘!”

언제나 소녀 같은 우리 엄마는 역시나 사랑 이야기에 소녀 같은 눈빛을 빛내며 대답했고 나는 멋쩍게 웃으며 카메라를 꺼내서 엄마에게 건넸다. 엄마는 왜 카메라를 줘? 라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씨익 웃으며 그 질문에 답했다.

“한 번 찾아봐. 찾으면서 외국은 어떤 동네인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보는 것도 좋잖아.”

그렇게 사진을 보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던 엄마와 나는 이상한 사진 한 장에서 대화가 끊어졌다. 고양이 한 마리가 어딘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사진이었는데 그 고양이의 눈빛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갑자기 엄마는 멍하니 있는 내 등을 두드리더니 감동했다는 듯 물어왔다.

“어머~ 이 사진 좋다. 여기서 찍은 거니?”
“아마도 사진 순서로 봐서는 여기 와서 찍은 걸 거야.”

그렇게 대답했지만 나는 고양이 사진을 찍은 기억이 전혀 없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게다가 엄마의 질문 공세에 길게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날 밤 중앙시장의 한 통닭집에서 공익후배들을 만난 나는 이 이야기를 했고 후배들은 흥미로워 하며 사진을 보여 달라고 했다.

“선배, 여기 배경으로 봐서 선배 아파트 후문 근처 벚꽃 나무 있는 곳 같은데요? 막내야, 내가 저번에 제대한 선배 한 분 여기에 산다고 이야기해줬을 때 이 벚꽃 나무 가리키면서 이야기 했지?”
“어라? 그러고 보니 그렇지 말입니다. 담벼락의 문양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었지 말입니다.”
“선배, 벌써 치매 오고 그래요? 선배 아파트 근처면 당연히 선배가 찍었겠죠.”
“그런가?”

같은 달동 주민인 후배의 강력한 주장에 약간 술에 취했던 나는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가서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확실히 특이한 담벼락하며 벚꽃 나무까지 이곳이 확실했다. 나는 고양이가 바라보던 방향으로 시선을 옮겨보았다. 늘 보던 평범한 풍경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무심코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은 다음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엄마가 만들어 준 콩나물국을 먹고 이번에 찍은 사진을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작업하고 남은 건 어젯밤에 찍은 단 한 장뿐이었는데 그 사진이 뭔가 이상했다. 거리에 떨어져 있는 벚꽃 잎이 묘하게 화살표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엄마, 나 잠깐 나갔다가 올게요.”
“언제 들어 올 거니?”
“글쎄, 늦어도 8시 이전에는 올게.”

어젯밤 사진의 벚꽃 잎은 이미 바람에 날아갔는지 남아 있지 않았지만 나는 화살표 방향으로 시선을 옮겨 보았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없는 그런 기분에 다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을 살펴보았다. 역시나 홀로 다른 방향으로 생긴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이 아닌 그냥 두 눈으로 봤을 때는 별 것 아니었는데 사진으로 찍고 작은 화면에 띄우자 뭔가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몇 시간을 그 의미를 나타내는 것들을 쫓기 시작했다. 고양이의 시선, 벚꽃 잎이 나타낸 화살표, 혼자 다른 방향으로 생긴 그림자, 유모차에 타고 있던 아이가 가리킨 곳 등을 따라서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해가 지고 결국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비둘기 공원 이었다.
더 이상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나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우스웠다. 사실 그런 의미들은 나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다시 한 번 카메라를 꺼내 오늘 찍었던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런데 점차 나중에 찍은 사진일수록 의미를 나타내는 사물을 제외한 다른 풍경들이 흐릿하거나 일그러져 있었다. 이제 나는 두렵기까지 했다. 뭔가 내가 몰라도 되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아닌지 무서웠다. 그때 누군가가 내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붉은색 후드 티를 입은 사내였다. 후드를 깊게 뒤집어써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미성년자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기에 라이터를 건넸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길게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고 길게 연기를 내쉬었다.

“오늘 하루 재미 있으셨나요?”
“네?”
“제가 조금만 늦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세상의 비밀을 파헤치신 겁니까?”
“세상의 비밀? 다..당신 누구야?”
“나이트 후드 입니다.”
“나이트 후드?”

세상의 비밀? 나이트 후드? 나는 이해하기 힘든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후드 티의 사내는 다시 한 번 길게 담배를 들이마시고 내쉬더니 바로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담배꽁초를 버리고 나에게 다가와 내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후드 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람의 눈은 정보를 전부 뇌에게 전달하지는 않아요. 필요 없는 정보는 알아서 없애버리죠. 그렇기에 평범한 사람들은 세상의 비밀을 나타내는 의미를 읽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당신의 눈은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이 있어요. 비록 당신은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로 그 능력을 사용했지만 지금 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당신의 현실의 현실을 볼 수 있겠죠. 그리고 당신은 안타깝게도 이미 늦었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사내의 얼굴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수많은 별이 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하늘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공원 안에 있던 그네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은 점차 조금씩 현실의 현실을 나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싫어! 이런 게 현실이라면 싫어, 싫어, 싫어. 아아악~”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오기 시작했다. 내가 본 현실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나는 두 눈을 감고 머리를 감싼 채 주저앉았다. 후드 티의 사내는 그런 내가 한심한지 혀를 차며 내 얼굴을 들어 올렸다.

“저런~이제는 어쩔 수 없네요. 당신이 살리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니 너무 나를 원망하지는 마세요.”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나는 대학병원의 병실 침대 위에서 정신을 차렸고 내 왼쪽 눈동자는 아주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엄마는 어쩌다가 그런 일을 당한 거냐고 울면서 물었지만 나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확인한 카메라에는 후드 티의 사내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손을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나는 다시 타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후드 티의 사내를 만나는 건 힘든 일이겠지만 만약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정말 간절히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다.

“당신 나이트 후드(Knight hood) 에요? 아니면 나이트 후드(Night hood) 인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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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치다.

from 단편 2009. 7. 6. 23:00 by 케르베로스

일요일도, 누군가의 생일도, 특별한 약속이 있는 날도 아니었다.
이른 아침 따뜻한 햇살이 좋았고, 갑자기 떠오른 좋은 멜로디의 음악이 즐거웠다.
새로 꺼내 신은 신발은 편했고, 오래된 회색 후드 점퍼는 아늑했다.

우연히 횡단보도 맞은 편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의 너를 발견한 나는
반가운 마음에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넌 미안하다고 말했던 3년 전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나를 스쳐 지나갔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점점 멀어지는 네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따뜻한 햇살은 눈이 부셨고, 흥얼거리던 멜로디도 거리의 소음에 묻혀 버렸다.
새로 꺼내 신은 신발은 불편했고, 오래된 회색 후드 점퍼는 너무 낡아 있었다.
오늘은 일요일도, 누군가의 생일도, 특별한 약속이 있는 날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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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잼

from 단편 2009. 7. 6. 21:18 by 케르베로스

새벽부터 차가운 비가 내리는 뜨거운 여름의 일요일 아침.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생각하지만  글쟁이는 그보다 더한 거짓말쟁이다.
창가에 앉아 가만히 내리는 비를 보며 담배를 피우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현관에 도착해 문을 열자 옆집에 사는 여자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저기 죄송한데 이것 좀 열어 주세요.」

유리병에 담긴 주황색의 액체는 좋은 향기를 내고 있었지만 잠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에 옆집에서 유난히도 달콤한 향이 났던 게 생각났다.

「단단히도 잠겨 있네요.」

위기에 처한 남자의 자존심을 위해 뚜껑에 억지로 힘을 주기 시작했다.
결국 잠겨 있던 뚜껑은 조금씩 움직이더니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유리병을 그녀에게 돌려주고 나니 주황색의 액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뭐에요?」
「살구 잼이에요.」
「향도 좋고 색도 예쁘고 맛있어 보이네요.」
「집에 오래 된 큰 살구나무가 있거든요.」

딸기잼은 몇 번 사서 먹은 적이 있지만 살구 잼은 아직 먹어보지 못했다.
맛이 궁금하긴 했지만 또 기회가 있겠지라며 돌아서는데 그녀가 말했다.

「같이 드실래요?」
「네?」

놀라서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그녀가 웃으며 유리병을 나한테 내밀었다.
그리고는 식빵을 가지고 와서 너무 당당한 모습으로 내 집으로 들어왔다.
실수로 먹고 싶어 한다는 표정을 지었던가? 생각하며 부엌으로 따라갔다.

「부엌 좀 쓸게요.」
「네, 그러세요.」

잠시 후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과 달콤한 향의 살구 잼이 식탁에 올라왔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 내와서 컵에 부은 다음 무심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아~ 죄송합니다.」

그녀의 놀라는 소리에 손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담배를 집어넣었다.
조금 불편했지만 오랜만에 괜찮은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어서 참을 만 했다.
살구 잼은 달콤했고 식빵은 바삭거렸고 우유는 시원했고 날씨는 흐렸다.

「뭐하시는 분이세요?」
「저 말인가요?」
「몇 번 만났는데 그때마다 시간이 다 달라서요.」
「그런가요?」

평소보다 조금 많이 먹었고 난 베란다 창가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녀는 돌아가지 않고 커피를 마시며 가만히 나를 보다가 그렇게 물어왔다.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다.

「뭐하는 사람 같아요?」
「백수.」
「그럼 그렇게 생각하세요.」
「화났어요?」
「전혀.」

그렇게 그녀가 돌아가고 나는 다시 조용한 일요일의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원래 친구를 만드는 성격도 아니고 시끄러운 곳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주말에 집에만 있는 것도 좋지 않다는 생각에 그냥 밖으로 나갔다.

「어서 와.」
「여전히 인기가 좋네.」

자주 가는 곳은 대형 서점과 케이크 전문점 그리고 집 근처의 공원 이었다.
케이크 전문점의 사장은 아주 오래 된 친구로 잘생긴데다가 성격도 좋았다.
덕분에 지금처럼 주말에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여학생들 손님이 많았다.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고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 몇 조각을 샀다.

「돌아갈까?」

내리는 비를 핑계로 결국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다시 집으로 향했다.
가만히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누군가 팔을 잡아 당기 길래 고개를 돌렸다.

「또 만나네요.」
「어디 갔다 왔어요?」
「그 쪽은 어디 갔다 왔는데요?」

달려왔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녀에게 케이크 상자를 보여주며 물었다.
그녀는 케이크 상자를 보고서 눈을 반짝이다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문제집?」
「고등학교 올라가니까 힘들어요.」
「너 고등학생이야?」
「설마 몰랐어요?」
「응.」

옆에 있는 그녀 아니 이 소녀 때문에 하루에 몇 번이나 놀라는지 모르겠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가만히 보고 있으니 어려보이는 거 같긴 하다.
소녀는 케이크 상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이상하다는 듯 나에게 말했다.

「교복 입었을 때 만난 적 있잖아요.」
「미안하지만 전혀 기억 안나.」
「무관심하시네요.」
「케이크 같이 먹을래?」
「저 케이크 무지하게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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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from 단편 2009. 7. 6. 21:17 by 케르베로스

붉은 비 뒤에 숨어 며칠 나타나지도 않고 바로 여름이 왔다.
무더운 날 평소보다 짙은 그림자를 바라본다.

내가 달리면 같이 달리고, 내가 울면 같이 울고,
내가 바라보면 녀석도 가만히 날 바라본다.

「뭐해, 어서 가자!」

라고 당장이라도 녀석은 나한테 말을 걸어 올 것만 같다.
어두운 곳을 가면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틀림없이 내 옆에 있다.
하루, 이틀 그리고 일년 내가 죽는 날까지도 내 옆에 있을 것이다.

언젠가 내가 죽으면 그림자도 죽겠지.
그렇다면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내 영혼은 날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내 그림자에 있으면 좋겠다.

그럼 녀석도 천국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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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from 단편 2009. 7. 6. 21:17 by 케르베로스

아무도 열어보지 않은 상자가 하나 있었다.
사람들은 상자 앞에 모여서 떠들기 시작했다.

「마피아의 총과 마약이 든 위험한 상자 입니다.」
「해적의 금은보화가 든 보물 상자야.」
「도서관으로 갈 책이 가득 든 상자인 거 같네요.」
「상인이 팔러 나온 병아리가 든 상자가 아닐까요?」

사람들 사이에 있던 부자는 못 참겠다는 듯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상자의 주인이 누구요? 내가 이 상자를 사겠소.」
「상자는 우리 모두의 것이니 모두에게 돈을 주면 당신의 것으로 인정해 드리리다.」

아무도 팔겠다는 사람이 없자 한 노인이 앞으로 나와 그렇게 대답했다.
그 자리에서 상자를 산 부자는 한 젊은이에게 상자를 대신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부자는 그 상자 안에 무엇이 있는지 두려워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열어보도록 하죠.」

청년이 상자를 열자 모두의 시선이 상자로 향했다.
하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상자는 텅 비어 있었고 그제야 모두들 만족한 표정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살 수 있는 힘과
그것을 팔 수 있는 지혜와
그것을 열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상자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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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from 단편 2009. 7. 6. 21:16 by 케르베로스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상처 하나씩을 가지고 산다.

이미 다 나은 것 같은 분홍빛 상처는

비가 오거나
깊은 밤이 되거나
혹은 어느 날에
갑자기 사람을 아프게 한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흘린 눈물은
하늘로 올라가고
하루, 이틀 그리고 일년이 지나서
눈물이 구름이 되면

어느 날 깊은 밤
비가 되어
다시 사람을 아프게 한다.

사람은 누구나 구름하나를 만들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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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

from 단편 2009. 7. 6. 21:15 by 케르베로스

비가 내리는 늦은 일요일 새벽.
파이널 판타지의 승리 팡파르가 방안 가득 울렸다.
청년은 간신히 잠에서 깨어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실례지만 L이라고 아세요?」

몇 살인지 모를 여자가 뜬금없이 물었다.
L이라는 이름은 너무 흔한 것이었다.
청년이 대답을 못하고 있자 상대가 먼저 말했다.

「K씨 맞으시죠?」
「네.」
「안녕하세요, 전 L의 여동생이에요.」
「안녕하세요, 그런데 왜 연락을?」

상대가 자신을 알고 있기에 청년은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L이 누군지 모르고 있었다.

「언니가 얼마 전에 자살을 했거든요.」
「그렇군요.」
「혹시 궁금해 하실까봐 연락했어요.」
「네.」

둘 사이에 긴 침묵이 가로 막았다.
여자는 침묵을 깨며 말을 했다.

「죄송해요, 이런 일로 전화해서...」
「2년 전에 죽었어.」
「네?」
「나한테 그녀는 이미 2년 전에 죽은 사람이야.」

청년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왜 자살했는지 이유 따위는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고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차갑게 돌아선 주제에 그렇게 보고 싶어 할 때는 보이지도 않다가
간신히 기억에서 지우고 나니까 이제 와서 죽었다는 소식으로 연락이 왔다.

「새벽부터 지독한 악몽이군.」

청년은 이불을 끌어안으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작은 동물이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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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15제

from 단편 2009. 7. 6. 21:06 by 케르베로스

1.우산: 비온 뒤에 더위가 오니까 우산을 먼저 사는 게 좋아.
2.부채: 선물하고 싶었던 청록색 부채는 어느새 매진이었다.
3.레모네이드: 레몬즙과 설탕 그리고 얼음으로 만든 음료.
4.그림자: 넌 영혼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
5.영화: 최근에 본 것은 일본영화 우울한 청춘 이었다.
6.여자: 토끼, 개, 고양이 주관적인 세 가지 분류방법.
7.남자: 늑대 주관적인 한 가지 분류방법.
8.합격: 형한테 제일 먼저 알리는 거야.
9.걱정: 수험생에게 놀아달라고 하는 건 무리일까?
10.추락: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11.바이올렛: violet, 붉은빛을 띤 청색.
12.대답: 그건 상황에 따라 몹시 다른 거야.
13.바보: 글쟁이라 적고 삼류 몽상가라 읽는다.
14.의문: 허수아비와 꼭두각시는 어떤 관계일까?
15.사과: 미안 누굴 좋아해본 적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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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from 단편 2009. 7. 6. 21:05 by 케르베로스

햇살이 너무 따뜻해서 일어나기 싫다.
포근한 하늘색 이불 속에 몸을 숨긴다.
절대로 내가 잠이 많아서 이러는 건 아니다.

-오후 1시.

어제 새벽까지 통화한 녀석은 뭐할까?
혹시 방금 전의 나처럼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전화해서 깨워주자!
나는 얼른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번.

언제나 이 음악이 흐른다.
사실 내가 하라고 시키긴 했지만...
자기는 싫다고 그래놓고 결국은 이거다.

「응, 왜?」

의외로 멀쩡한 목소리로 녀석이 받았다.
나는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일찍 일어났네?」

순간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사악한 녀석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너 이제 일어났지?」
「아니야!」
「1시인데 배고프겠다.」
「아침에 식사했네요.」
「먹을 것 좀 사서 놀러갈까?」
「응?」
「네가 좋아하는 덮밥 사갈께.」

아직 세수도 못했는데 큰일 났다.
아마 나는 평생 이 녀석을 못 이기겠지.

「어디가지 말고 기다려.」
「응,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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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from 단편 2009. 7. 6. 21:05 by 케르베로스

「심야요금 입니다.」

야심한밤
그는 작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여기저기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거나,
핸드폰으로 대화를 나누고,
담배 연기를 만들거나,
지도를 꺼내 보거나,

20분후에 도착할 버스를 기다리며
모두들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바람이 부네.」

시원한 바람이 그를 스쳐 지나가고
버스가 도착한다.

아직 바람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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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from 단편 2009. 7. 6. 21:03 by 케르베로스

이어폰을 끼고 탁자에 누워서
녀석은 피곤한지 곤히 자고 있었다.

「자는 모습은 정말 귀엽네.」

녀석의 옆에 앉은 나는
이어폰 한쪽을 빼서 내 귀에 넣었다.

-무얼 그리 망설이 나요
-뭐가 그리 맘에 걸리죠?
-지난 노래 가사처럼
-술에 취한 목소리로
-고백하면 어때요?
-그녀를 만나요
-그리고 손을 잡아요.
-떨리는 숨결로 마음을 전해요.
-그녀의 눈빛이 그 말을 기다리겠죠.
-이젠 준비됐나요?
-그럼 말해요
-난 네가 너무 좋아!

「노래 좋지?」
「뭐..뭐라는 거야.」

언제 일어났는지 녀석이 날 보고 있었다.
나는 빨갛게 변한 얼굴을 숨기기 위해 얼른 일어났다.
그런데 녀석은 내 손목을 붙잡으며 천천히 말했다.

 「난 네가 너무 좋아.」
,

질문

from 단편 2009. 7. 6. 21:02 by 케르베로스

「어서 오세...」

바람이 차가운 어느 겨울 날.
담배가 없어서 근처 편의점으로 갔다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그 녀석을 만났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오랜만이네.」
「응, 잘 지냈어?」
「그럭저럭, 뭐 사러 온 거야?」

나는 멍하니 그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녀석의 말에 간신히 답했다.

「던힐 한 갑 줘.」
「담배, 다시 피는 거야?」
「그렇게 되었네.」

머리는 얼른 이 곳을 떠나라고 고함치고
마음은 조금만 더 있으라고 떠들고 있었다.
그 때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 때문에...」
「응?」
「나 때문에  다시 피는 거야?」
「아마도 그럴 거야.」
「우연이라도 다시 만나고 싶었어.」
「편하지 않았어?」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녀석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다시 내 옆으로 돌아 와줄래?」
,

여행

from 단편 2009. 7. 6. 21:00 by 케르베로스

여행을 결심한 건 그해 여름이었다.

햇살과 바람 그리고 레모네이드는
사람들의 기분을 축제처럼 만들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길게 늘어난 흐릿한 내 그림자.
연두, 보라, 주황빛으로 물든 오후 하늘.
오래된 선풍기가 돌아가며 내는 소리.

멍하니 누워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어두운 바람에 흩어지는 회색 연기.

「여보세요?」
「나야.」
「이 야심한 밤에 무슨 일이야?」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 했지.」
「거짓말은 하지 마.」
「나 방금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어.」
「정말?」
「요즘 들어 너무 지쳤어.」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에...」
「설마 언제 갈건지도 안 정했냐?」
「미안.」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나는 가만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실 좋은 곳은 무지하게 많았다.
 
그렇게 어느새 겨울이 왔다.
새 코트, 새 가방, 새 청바지, 새 신발.
나는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귀찮게 왜 부른 거야?」

나는 녀석의 집 앞 놀이터에 있었다.
녀석은 추운지 하얀 입김을 만들어 냈다.

「생각해봤는데...」
「이야~ 준비 많이 했네.」
「카메라도 새로 샀어.」
「어디로 갈 건지 정했어?」
「아니.」
「오늘 간다며!!」
「그래서 말인데...」
「응.」
「너랑 함께 가고 싶어.」
「응?」
「너랑 가면 어디라도 좋아.」
「그거 고백이야?」
「응, 널 좋아해.」
「난 아직 아무런 준비도...」
「내가 다 했어.」

녀석은 얼굴을 붉히며 당황해했다.
나는 웃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나랑 같이 갈래?」
,

햇살

from 단편 2009. 7. 6. 20:56 by 케르베로스

눈부신 햇살의 나날이 계속 되는 하루.
나는 우연히 결혼식장의 주차장 일을 하게 되었다.
 
모두들 5월의 신부를 놓치지 않겠다는 건지,
5월의 마지막 주의 결혼식은 엄청나게 많았다.

그만큼의 하객들이 몰려들어서 아르바이트생의
입장에서는 축복받을 결혼식이 지긋지긋 하고
짜증나는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요금을 계산하며
언제나 늦장을 부리며 교대하는 후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제법 부지런히 움직인 건지
10분정도 늦게 나온 녀석이 헤벌레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형님 미안해요.」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수고해라.」
「말속에 뼈가 있네요.」
「하하하~」

가볍게 웃어 보이며 밖으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일도 편하고 돈도 괜찮은 일이지만
조만간 그만두고 다시 글을 써야지 라며
생각을 정리하는데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흐음~」

아는 사람인가라며 기웃기웃 거리는 데
그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저기 여기 화장실이 어디에요.」
「아~ 저기 일층에 가서 계단 옆에 보면...」

급했는지 부끄러웠는지 이야기를 다 듣지도 않고 달려간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도 내가 아는 그녀가 아닌 모양이다.
햇살이 눈부신 5월의 끝을 잡고 잊은 줄 알았던
오래전의 그녀를 떠올리고 말았다.
지금의 그녀에게 내심 미안해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아르바이트 중이야?」
「응.」
「여자들 많이 오지?」
「하하~ 응, 되게 많이 와.」
「왜 웃어?」
「아무것도 아니야.」
「뭔가 의심스러운데?」
「나중에 나 퇴근하고 영화 보러 가자.」
「은근슬쩍 넘어가는 게 이상하지만...」
「이상 하지만?」
「뭐~ 맛있는 것도 사주면 용서해줄게.」
「물론이지 사줄게.」

5월의 햇살은 눈부시지만
나한테는 더 눈부신 그녀가 지금 있으니까
더 이상 과거에 매달리지 말아야지.

「하품이나 하고 있을 후배나 도와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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