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잼

from 단편 2009. 7. 6. 21:18 by 케르베로스

새벽부터 차가운 비가 내리는 뜨거운 여름의 일요일 아침.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생각하지만  글쟁이는 그보다 더한 거짓말쟁이다.
창가에 앉아 가만히 내리는 비를 보며 담배를 피우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현관에 도착해 문을 열자 옆집에 사는 여자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저기 죄송한데 이것 좀 열어 주세요.」

유리병에 담긴 주황색의 액체는 좋은 향기를 내고 있었지만 잠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에 옆집에서 유난히도 달콤한 향이 났던 게 생각났다.

「단단히도 잠겨 있네요.」

위기에 처한 남자의 자존심을 위해 뚜껑에 억지로 힘을 주기 시작했다.
결국 잠겨 있던 뚜껑은 조금씩 움직이더니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유리병을 그녀에게 돌려주고 나니 주황색의 액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뭐에요?」
「살구 잼이에요.」
「향도 좋고 색도 예쁘고 맛있어 보이네요.」
「집에 오래 된 큰 살구나무가 있거든요.」

딸기잼은 몇 번 사서 먹은 적이 있지만 살구 잼은 아직 먹어보지 못했다.
맛이 궁금하긴 했지만 또 기회가 있겠지라며 돌아서는데 그녀가 말했다.

「같이 드실래요?」
「네?」

놀라서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그녀가 웃으며 유리병을 나한테 내밀었다.
그리고는 식빵을 가지고 와서 너무 당당한 모습으로 내 집으로 들어왔다.
실수로 먹고 싶어 한다는 표정을 지었던가? 생각하며 부엌으로 따라갔다.

「부엌 좀 쓸게요.」
「네, 그러세요.」

잠시 후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과 달콤한 향의 살구 잼이 식탁에 올라왔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 내와서 컵에 부은 다음 무심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아~ 죄송합니다.」

그녀의 놀라는 소리에 손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담배를 집어넣었다.
조금 불편했지만 오랜만에 괜찮은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어서 참을 만 했다.
살구 잼은 달콤했고 식빵은 바삭거렸고 우유는 시원했고 날씨는 흐렸다.

「뭐하시는 분이세요?」
「저 말인가요?」
「몇 번 만났는데 그때마다 시간이 다 달라서요.」
「그런가요?」

평소보다 조금 많이 먹었고 난 베란다 창가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녀는 돌아가지 않고 커피를 마시며 가만히 나를 보다가 그렇게 물어왔다.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다.

「뭐하는 사람 같아요?」
「백수.」
「그럼 그렇게 생각하세요.」
「화났어요?」
「전혀.」

그렇게 그녀가 돌아가고 나는 다시 조용한 일요일의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원래 친구를 만드는 성격도 아니고 시끄러운 곳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주말에 집에만 있는 것도 좋지 않다는 생각에 그냥 밖으로 나갔다.

「어서 와.」
「여전히 인기가 좋네.」

자주 가는 곳은 대형 서점과 케이크 전문점 그리고 집 근처의 공원 이었다.
케이크 전문점의 사장은 아주 오래 된 친구로 잘생긴데다가 성격도 좋았다.
덕분에 지금처럼 주말에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여학생들 손님이 많았다.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고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 몇 조각을 샀다.

「돌아갈까?」

내리는 비를 핑계로 결국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다시 집으로 향했다.
가만히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누군가 팔을 잡아 당기 길래 고개를 돌렸다.

「또 만나네요.」
「어디 갔다 왔어요?」
「그 쪽은 어디 갔다 왔는데요?」

달려왔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녀에게 케이크 상자를 보여주며 물었다.
그녀는 케이크 상자를 보고서 눈을 반짝이다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문제집?」
「고등학교 올라가니까 힘들어요.」
「너 고등학생이야?」
「설마 몰랐어요?」
「응.」

옆에 있는 그녀 아니 이 소녀 때문에 하루에 몇 번이나 놀라는지 모르겠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가만히 보고 있으니 어려보이는 거 같긴 하다.
소녀는 케이크 상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이상하다는 듯 나에게 말했다.

「교복 입었을 때 만난 적 있잖아요.」
「미안하지만 전혀 기억 안나.」
「무관심하시네요.」
「케이크 같이 먹을래?」
「저 케이크 무지하게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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