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from 단편 2009. 7. 6. 21:00 by 케르베로스

여행을 결심한 건 그해 여름이었다.

햇살과 바람 그리고 레모네이드는
사람들의 기분을 축제처럼 만들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길게 늘어난 흐릿한 내 그림자.
연두, 보라, 주황빛으로 물든 오후 하늘.
오래된 선풍기가 돌아가며 내는 소리.

멍하니 누워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어두운 바람에 흩어지는 회색 연기.

「여보세요?」
「나야.」
「이 야심한 밤에 무슨 일이야?」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 했지.」
「거짓말은 하지 마.」
「나 방금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어.」
「정말?」
「요즘 들어 너무 지쳤어.」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에...」
「설마 언제 갈건지도 안 정했냐?」
「미안.」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나는 가만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실 좋은 곳은 무지하게 많았다.
 
그렇게 어느새 겨울이 왔다.
새 코트, 새 가방, 새 청바지, 새 신발.
나는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귀찮게 왜 부른 거야?」

나는 녀석의 집 앞 놀이터에 있었다.
녀석은 추운지 하얀 입김을 만들어 냈다.

「생각해봤는데...」
「이야~ 준비 많이 했네.」
「카메라도 새로 샀어.」
「어디로 갈 건지 정했어?」
「아니.」
「오늘 간다며!!」
「그래서 말인데...」
「응.」
「너랑 함께 가고 싶어.」
「응?」
「너랑 가면 어디라도 좋아.」
「그거 고백이야?」
「응, 널 좋아해.」
「난 아직 아무런 준비도...」
「내가 다 했어.」

녀석은 얼굴을 붉히며 당황해했다.
나는 웃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나랑 같이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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