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奈落)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극한 상황
눈이 내리는 숲에 서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무작정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하얀 입김이 시야를 가린다.
뒤를 돌아다본다.
나를 쫒아오는 발자국과 오른쪽 손목까지 이어진 붉은 선.
여긴 달이 아니라 나락인가?
한참을 더 걸어서 도착한 곳은 오래된 목조 건물이었다.
지붕의 앞쪽 중앙에는 붉은색의 한자로 역(驛)자가 쓰여 있었다.
건물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티켓을 꺼내 확인했다.
기차를 기다리며 옆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피곤하다.
「딱히 할 이야기가 없네.」
「그러게...」
「사실 난 너랑 문자주고 받다가 생기는 이런 공백이 좋아.」
「그게 뭐가 좋냐?」
「글쎄~ 좋아하는 사람이랑 이야기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
「응, 난 그게 좋아.」
「그런데 나는 두 손 꼭 잡고 거리를 걷는 게 더 좋아.」
「난 걷는 거 싫은데...」
「그런 느낌이랄까?」
「바보.」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소리에 잠에서 일어났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맞은편 의자에 소년이 앉아 있다.
「반가워.」
「네? 네, 안녕하세요.」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네.」
소년이 미소를 짓는다.
아는 사람인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애쓰지 마. 어차피 기억나지 않을 거야.」
「그런가요?」
「나는 마술사 엘(EL).」
「저는...」
얼른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제일 뒷장을 펼친다.
그리고 내 이름을 확인한다.
「이름을 잃어 버렸어요.」
그 다음은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