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밤의 꿈

from 시작/생각 2009. 11. 15. 19:08 by 케르베로스


언제부터인지 솔직하지 못한 채 내 연애에 대해서 두루뭉실하게 말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끝이 난 연애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았고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연애에 패널티로 적용될까봐 겁나는 마음도 있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두서 없이 생각나는대로 조금 솔직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다.

11월 이지만 호주는 구름이 낀 무더운 여름이다. 이런 날은 왠지 그냥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어 진다. 물론 그 녀석과 처음 가진 데이트이자 마지막이었던 만남이 이런 꼭 비가 내릴 것 같은 여름 이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얼마 전부터 그 녀석과 다시 연락이 되고 이메일 주소만 알던 게 최근에는 핸드폰 번호도 주고 받았다는 것이다. 비록 나는 호주에 있어서 연락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하고 답답해하던 예전보다야 많이 나아진 거 아닌가?

주변 사람들은 그 여자 애는 니가 좋아서 연락하는 게 아니라 그냥 좋은 오빠로서 연락하는 거다. 그러니 너무 빠지지 마라. 결국에는 너 혼자 또 상처 입을 거다라며 나에게 조언들을 해주었다. 호주에 있다보면 한국의 인연이 별 거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나 역시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와 있는 사람들과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뭐 그건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주제와 크게 관련이 없으니 넘어가도록 하고 나 역시 녀석이 내가 다시 좋아져서 연락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좋은 오빠로서 나를 생각하고 연락하는 거겠지. 하지만 확실히 문제는 나다. 그 녀석과 사귈 때 그 녀석한테 "나는 너랑 헤어지면 다시 연애 못할 거 같아." 라는 이야기를 한 적 있는데 그 녀석은 그걸 어떻게 아냐? 라고 되 물었고 난 그냥 그런 기분이 든다고 대답했다. 논리적인 이해가 아닌 느낌이 그랬으니까 솔직한 대답 이었다.

말이 씨가 되는건지 확실히 호주에 와서 1년 동안 연애를 못했다. 그렇다고 손놓고 있었던 건 아니고 물론 다른 여자와 데이트도 하고 그랬는데 사실 외로워서 데이트 신청을 하는거지 내가 진심으로 상대여자들이 좋아서 데이트 신청을 한 건 아니라는 거다.

갑자기 커피가 마시고 싶어진 나는 아이스 모카를 사서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서 여전히 나를 들뜨게 하는 그 녀석을 생각했다. 화가 나다가 기쁘고 슬프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했다. 그 녀석이 나에게 쓴 편지가 하나 있는데 편지 끝에는 자기가 내 마지막이 되고 싶다고 적혀 있었다. 연애할 때 사랑한다, 헤어지지 말자, 난 너밖에 없다 등등 달콤한 말이야 넘쳐 나겠지. 그래 그 말들을 다 어떻게 믿겠어. 그런데 나는 슬프게도 정말 그 녀석이 내 마지막이 되어줬으면 좋겠다.

무슨 사춘기 소년이 적은 글 처럼 겁나게 유치해 보인다. 이걸 쓰고 있는 이유도 모르겠다. 다만 그냥 나중에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할까봐 기록해둔다. 그래, 나는 아직 그 녀석을 사랑한다. 그리고 앞으로 그 녀석을 사랑할 거 같다. 그 녀석의 미소도 아직 떠오르고 그 녀석의 목소리도 떠오르고 그 녀석의 향기도 떠오르고 추억은 왜곡되서 지워지지도 않고 이제는 그 녀석에게 나는 그저 좋은 오빠라고 해도 곧 한국에 가서 그 녀석을 만나서 좋은 오빠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게 되더라도 스스로에게는 솔직해지자. 뭐 나중 일은 아무도 모르잖아. 정말 내가 원하는 것 처럼 그 녀석도 다시 내가 좋아졌다던지...젠장, 더럽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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