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화음

from 시작/생각 2009. 7. 7. 23:12 by 케르베로스
다른 도시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살던 곳에서는 중학교에서 한해에
한번 정도 합창 대회가 열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정곡이 있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고,
등수를 매겨서 상을 주는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었다.

그러나 전교생이 의무적으로 참가하는 것은 다르지 않았고,
방과 후에 남아서 단체로 연습하는 것이 달가운 일은 아니다.
집에 가서 가방 던져놓고 학원 가기 전에 잠깐 눈 붙이고 싶기도 하고,
한번 본 영화를 다시 보기도 싫은데
같은 노래를 한달 가까이 연습하려니 넌더리가 날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한둘이 학원에 가고 병원에 가고 제사에 간다며
개인 사정으로 빠지다보면
결국 여럿이 빠지게 되고 때로는 연습이 취소되기도 한다.
그 소식이 알려지면 담임 선생님이 조회 시간에 호통을 치셔서
아침부터 유쾌하지 않은 시작을 하기도 하고,
너희들 너무한다며 마음 약한 반장이 울어버리기도 했다.
단체라는 이름이 붙은 것 중에서
흡족했던 경험이 드물지만 기합과 연습은 더욱 그랬다.

그러나 막상 합창 대회가 시작되고
무대에 올라가서 그동안 연습했던 것을 발휘하노라면 느끼게 된다.
합창이란 얼마나 즐거운 공동체의 산물인가를 말이다.
알토, 메조 소프라노, 소프라노로 나뉘어진
스물 셋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인다.

사춘기를 갓 벗어난 소녀들의 목소리는
동이 텄지만 아직 해가 보이지 않은 하늘에
수줍게 걸려있는 초승달처럼 산뜻하였다.
누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지만,
이름 모를 잡초라도 괜찮다 싶을 정도로
여럿이서 하나의 화음을 이룬다는 것은 멋진 일이었다.

내가 개떡처럼 말을 해도 상대방이 찰떡처럼 알아들을 때,
내 방식대로의 농담을 상대방이 헤아려 멋지게 맞받아칠 때,
끝이 나지 않는 실뜨기를 빠른 속도로 할 때,
배드민턴의 셔틀콕이 쉴 새 없이 날아다닐 때,
우주는 아름다운 조화가 있는 전체라는 것을 느낀다.

짝사랑이라는 단어는 오미자처럼 달고 시고 쓰고 짜고 맵다.
그렇다고 맛이 없는 것은 아니며,
나는 오미자 달인 물을 좋아하는 편이다.

짝사랑은 상대방과 합의가 없어도 혼자 시작할 수 있으며,
물리적 시간과 금전이 비교적 크게 들지 않고,
자존심 싸움을 벌이거나 스킨쉽 진도를 두고 타협할 일도 없다.
물론 상대가 보인 작은 반응을 해석하느라 시간 다 잡아먹고,
꽃을 들고 그가 나를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를 반복하며
잎사귀 떼다가 구제할 수 없는 자기 연민을 느낄 수도 있으며,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상대방을 원망하면서 음유시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짝사랑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본체와 모니터는 어찌 할 수 없다지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환상을 덧씌울 수 있으며,
가상 시뮬레이션으로 이상적 연애를 체험하는 것이 가능하며,
마음 내키는대로 그만 둘 수도 있다.

근데 나 짝사랑을 해본 게 언제던가.
아파서 말도 못할 정도의 짝사랑을 경험하고 난 이후
짝사랑이란 감정의 소모일 뿐이라는 생각을 굳혔고,
이성적인 호감이 교환되고 있다는 확신을 느끼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았다.

만남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집착, 애증, 질투, 허세를
세련되게 숨기는 방법을 터득하고 표현의 기교도 늘어가지만
방어 기제는 강해져서 조금만 상대방이 나에게
상처줄 기미를 보이면 방화벽을 둘러버리는 것이다.

타인은 내가 아니고, 내가 아니면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중심부에 닿을 수 없고 온전히 알 수 없다고 해도,
당신은 여전히 내 탐구의 대상이며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목표이다.
다장조가 아니면 악보를 읽을 수 없는 나라도 음을 더듬어가며 반복하다보면
언젠가 당신과 멋진 화음을 맞을 수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