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모자가 없는 시대

from 시작/생각 2009. 7. 7. 22:29 by 케르베로스
설령 이 시대에 큰 문제가 있다 해도 주동자의 동상이 없고, 주모자의 깃발조차 없으니 모순과 부조리를 발견해도 대항하고 투쟁할 수가 없다.

-생각은 날마다 나를 새롭게 한다. 김형태.


모호하다. 나의 생활은 괴롭고 고통스러운데, 그렇게 만드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나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속시원하게 그 '악(惡)'이 정체를 드러내면 맞서 싸우기라도 할텐데, 애써 소리쳐도 눈에 보이는 것은 없다. '실체가 없음' 은 그 자체가 공포가 되어 나를 더 옥죈다.

문제는 바로 이거다.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어도 달리 불만을 풀 곳이 없다. 악당은 누구요 악의 조직은 어디 있단 말인가? 찌질이들의 말버릇대로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를 외치며 노무현을 탓한다 해도, 노무현이 없다 해서 나의 불안이 풀릴 것 같지는 않다. 노무현 비슷한 놈이 그 자리에 앉아 다시 나를 엿먹일 거다. 노무현이 문제가 아니다. 노무현보다 더 큰 무언가가 그 뒤에 있다. 아니 있어야만 한다.

음모론은 그래서 사랑받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불안의 정체를 속 시원하게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프리메이슨이나 오푸스 데이, NHK라면 내 불안을 믿고 떠넘기기에 적당하다. 불안의 실체가 정해지면 나는 편해진다. 실체 있는 악의 조직이 나를 괴롭힌다- 그 순간 우리는 싸울 수 있다.

사실 음모론 따위는 따지고 보면 말도 안되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고통스러울 뿐이다. 아무 것도 분명한 게 없으니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고 누구를 맘 편히 비난할 수도 없다. 실체가 없으니 억지로라도 실체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주모자가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이다. 보이지 않는 악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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