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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from 시작/생각 2009. 7. 30. 01:49 by 케르베로스
영어 스쿨에 다닐 때 일인데, 집에서 가장 편한 공간이 어디인가? 라는 질문이 나오자 아무래도 자기 방이 가장 편하겠지라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놀랍게도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키친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키친의 의미를 그저 요리를 하는 공간 정도로만 생각했었지 편한 공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부엌은 라면을 끓이는 곳 아닌가요?

나는 오랜 시간을 마루와 마당이 있는 한옥의 양식을 따른 집에서 살았었다. 그래서인지 집에서 가장 편안 공간 이라고 하면 나는 마루와 마당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호주로 유학와서 아니 그전에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마루와 마당은 베란다와 정원 같은 지극히 현대적이며 서양적인 것으로 대체 되었지만 서양 문화의 사람들이 키친을 집에서 가장 편한 공간으로 고르는 것처럼 나에게는 마루와 마당이 그런 공간이었다.

초봄, 눈 대신 내리던 비가 좋았다.

마루에서 빗방울이 처마에서 떨어지는 것을 구경했던 기억, 마당에서 친척들과 옥수수를 삶아 먹었던 기억, 아버지와 마당 구석에 있던 감나무의 감을 따던 기억 그리고 마루에 나가 마당에 가득 쌓인 눈 속에서 뛰어 놀던 강아지를 보았던 이런 기억들이 마루와 마당은 가장 편한 공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 같다. 하지만 추억만이 마루나 마당을 편하게 느끼게 했다고 보기에는 뭔가가 부족했다.

영어 스쿨이 끝나고 르 꼬르동 블루 에서 프랑스 요리를 배우면서 키친에서의 생활 시간이 한국에서와 달리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었고 다시 키친에 대해서 생각해봤지만 역시나 평생의 직업 공간이 될 곳에서 편안함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르 꼬르동 블루의 키친은 전문가 양성을 위한 목적 때문에 가끔은 내가 닭의 뼈와 살을 분리하고 있을 뿐이지 칼을 든 전사와 다른게 뭔가 싶을 때도 있다.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의 부엌은 절대 아니다.

그러던 중 항상 집까지 나를 태워주는 이스라엘 출신의 친구와 이 이야기를 나누게 생겼다. 이스라엘 친구는 사람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무언가 일이 생기고 그게 추억이 되고 가슴에 남는 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서양권에서는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자기 집으로 식사 초대를 많이 한다. 하지만 한국은(최소한 우리 집은) 식사보다는 가벼운 차나 커피 혹은 다른 음료나 다과를 거실 혹은 마루에서 먹는 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건 어찌보면 즐겁고 편한 일이 아닐까? 내가 타인을 만났던 마루를 편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외국 친구들이 타인을 만났던 키친을 편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예전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가 너무 힘들어서 무인도에서 혼자 살고 싶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용기를 조금 내서 타인을 나의 키친으로 초대해야겠다. 그리고 나 또한 남들처럼 키친이 편하다고 느낄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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